이상국 (Sang Kook Lee)
2019 Fulbright Visiting Scholar Program
Duke University – Asian/Pacific Studies Institute

나는 2020년 1월부터 1년간 풀브라이트 연구 장학 프로그램의 수혜를 받아 노스캐롤라이나 소재 듀크대학교 아시아태평양연구소(Asian/Pacific Studies Institute)에서 방문학자로 지냈다. 내 연구주제는 미국에 거주하는 동남아 출신 난민의 적응 양상이었다.

나는 연구년을 보낼 대상지로 미국을 비교적 일찍 정하고 풀브라이트의 지원 프로그램도 알아보았다. 내 연구지역은 아시아, 특히 동남아(그중에서 태국-미얀마 국경)였고, 박사 유학도 싱가포르에서 했다. 연구현장의 한 복판 또는 가까이에서 공부를 했고, 싱가포르가 제공하는 나름의 글로벌 교육 인프라를 누리고 만족하며 학위과정을 밟았다. 그러나 내 연구분야에서 미국이 오랫동안 세계 학문의 중심 역할을 해왔기에, 이번 연구년을 통해 그곳에서 새로운 연구 인프라와 학풍을 경험하며 그동안의 연구를 보완하고 확장하고 싶었다.

내 가족이 처한 생활주기 단계 역시 현실적으로 미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될 아들과 유치원에 들어갈 딸이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고, 미국의 대자연 속에서 문화인류학자의 자녀로서 타문화의 역사와 문화를 경험하며 다문화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자녀 출산과 육아로 경단녀의 삶을 살고 있는 아내도 대학 전공(특수교육학)과 관련된 기관에서 자원봉사 등의 활동을 하며 단절된 경력에 불씨를 지피는 기회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내가 진행하고 있는 연구주제 역시 미국과 관련되어 있었다. 나는 그동안 태국과 미얀마 국경지역 난민촌에 거주하는 미얀마 카렌족 난민을 주로 연구해왔다. 그런데 이들이 2000년대 중반 이후에 유엔난민기구와 주로 선진국들이 협력하여 추진하는 재정착 프로그램의 수혜를 받아 그 난민촌을 떠나갔다. 그렇게 떠난 사람들이 11만명에 이르렀고, 내가 알고 연구하던 난민들도 그 대열에 끼었다. 학교에 자리를 잡은 뒤 나는 그들의 새로운 삶을 관찰하고 그들의 얘기를 들으려고 호주, 노르웨이, 스웨덴, 일본 등지를 찾아다녔다. 한국에도 80명가량의 카렌족 난민들이 재정착되어 있어 가끔씩 그들의 거주지인 인천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 재정착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데에 당시 미국의 리더십을 빼놓을 수 없다. 퍼스트레이디인 로라 부시는 내가 머물렀던 난민촌을 방문하며 미국이 이들을 받아들일 것이라 약속했고 이후 실제로 7만명가량을 받아들였다. 전체 11만명의 재정착 카렌족 난민 중 7만명이 살아가는 미국은 그들에게도 중심 국가이며 나로서도 그 중심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참여관찰하는 것은 내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구의 핵심이었다.

이렇듯 연구자로서 내 생애주기로 보나, 가족의 생활주기 단계로 보나, 연구주제로 보나 미국에서 보내는 1년의 연구년은 새로운 전환기가 될 터였다. 우리 가족은 2019년 12월 30일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고, 듀크대 출퇴근이 쉽고, 깨끗하고 안전하고 가성비 높은 거주지로 부상한 캐리(Cary)에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며칠 전 중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성을 보고했다고는 했지만, 그저 지나가는 뉴스였고, 내 앞길과 전혀 상관없을 일이었다. 나와 내 가족은 비교적 수월하게 초기 정착 과정을 지났다. 나는 미리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수도, 가스, 전기, 인터넷 등 유틸리비 서비스를 신청했다. 사회보장번호(Social Security Number)가 없어 일부 서비스는 번거로운 과정을 겪기도 했지만 대체로 무난하게 일이 진행되었다. 가구, 각종 생활용품, 자동차는 전에 살던 사람에게서 물려받았다. 운전면허도 곧바로 취득했다. 큰 아이도 바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둘째 아이도 7월 무렵 유치원에 들어가기 앞서서 어린이집 생활을 시작했다. 듀크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는 공간 사정이 어려운데도 풀브라이트 학자인 나를 우대하여 단독 사무실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1월 캐리의 날씨는 포근했고, 곳곳의 황홀한 숲속 그린웨이(산책길)는 나를 몰아지경에 빠져 뛰게 만들었으며, 나는 이대로만 하면 보스턴마라톤에 참가할 수 있는 기록을 달성할 수 있을 터였다. 고딕 양식의 듀크대의 아름다운 캠퍼스를 거닐며, 아시아태평양연구소의 각종 학술모임에 참여하며 나는 충일한 감상, 뭔가 뿌듯한 느낌에 젖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1월 말로 접어들면서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지됐고, 나는 마트에서 장을 볼 때나 둘째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올 때나 내 동양인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재채기나 기침을 꾹 참을 때가 많았다. 주류 백인사회에 마이너리티인 내가 어떻게 비쳐질까를 신경쓰고 있었던 것이다.

2월에 접어들어 여전히 분위기는 뒤숭숭했지만, 일상은 지속되었다. 듀크대는 여전히 활기찼고, 나는 주변의 카렌족 재정착 난민을 부지런히 만나러 다녔다. 몇 사례를 소개하자면, 그린스보로(Greensboro)에는 내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난민 친구가 목회자가 되어 카렌족 교회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교회와 그 친구 집을 방문하며 그와 가족이 어떻게 미국에서 살와왔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페이엣빌(Fayetteville)에서는 할아버지(2차대전시 버마전선에 참전한 징병)가 한국인이라는 카렌족 난민 가족과 재회하며 미국 생활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2월 말 무렵 나는 한국의 가족과 동료와 연락을 주고받을 때 난리통인 한국을 떠나 미국에 참으로 잘 들어갔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상황은 곧 반전되었다. 3월 중순으로 향하자 미국, 특히 뉴욕은 아비규환이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도 마트의 생필품이 동나고, 마스크는 구할 길이 막막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한국에서 챙겨온 미세먼지 용 마스크가 있었다. 이제 한국의 가족과 동료들은 내 안부를 몹시도 걱정하며 필요하면 마스크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첫째의 학교와 둘째의 어린이집도 문을 닫았고, 듀크대 역시 학교 출입을 막았다. 재정착 난민을 만나러 다니는 일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평온함을 지키려고 했지만, 때때로 엄습해오는 두려움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잠자리에 누울 때, 나와 내 가족이 코로나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면, 보험을 들긴 했지만 그 악명 높은 미국의 병원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을까, 아이들의 학교는 언제 다시 열 수 있을까, 첫째 아이는 이제 막 학교생활에 적응하며 재미를 느끼려던 참이었는데 과연 온라인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까, 둘째 아이는 아직 말도 못하는 처지인데 저렇게 끝나버리는 것은 아닌가, 이럴 거면 차라리 한국으로 돌아가 한국 학교 공부를 따라가야하는 것은 아닌가, 비싼 집세와 생활비를 축내며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만 하는가, 라는 생각들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온종일 첫째의 온라인 수업을 봐주느라 씨름했다. 낯설고 서투른 온라인 수업을 받느라 아이도 허둥지둥했다.

찬란한 4월, 모든 것이 락다운에 처한 잔인한 달이었다. 마지막까지 기대를 걸었던 마라톤 대회도 취소됐고, YMCA 등 생활체육시설, 공원, 놀이터, 교회, 아이들의 특별활동 프로그램 등 모든 것이 문을 닫았다. 첫째의 온라인 수업을 봐주느라 나는 계속 끙끙댔고, 둘째는 방치되어 어린이 TV 프로그램 앞에서 빈둥빈둥 시간을 보냈다. 찬란한 날씨의 유혹과 집 생활의 답답함에 못이겨 집 주변 그린웨이를 달리며 그날의 스트레스를 날리며 내 마인드를 리셋하며 하루하루 버텼다. 교민들과 고국분들과 풀브라이트의 위로와 격려 역시 나와 내 가족이 살아가는 데 힘이 되어 주었다.

달리 생각해보면 나는 의도치는 않았지만 인류학자로서 코로나 위기 한가운데서 참여관찰을 하며 미국사회를 알아가고 있는 셈이었다. 이 사태를 계기로 미국의 의료 현실, 국가와 개인의 긴장 관계, 연방정부와 개별 주정부의 역학, 인종 관계 등을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었다. 특히 5월 말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을 계기로 미국 도처에서 전개된 ‘블랙라이브스매터’(Black Lives Matter,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은 내가 미국사회의 주요 모순이 폭발하는 현장에 와있다는 실감을 갖게 해주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미국에 도착한 해는 미국에 공식적으로 흑인 노예가 도착한 지 4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등 미국 국부들도 독립선언서의 내용과 맞지 않게 노예를 소유했고, 미국 헌법에서 노예가 인간의 3/5이라는 취급을 받았고, 내가 사는 노스캐롤라이나를 비롯한 남부 주들에서 노예제 유산이 무형의 형태로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고, 마틴 루터 킹이 미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과 그에 대한 기념이 대단하다는 것 등을 나는 여기에서 다시금 확인하거나 새롭게 알게 되며 미국의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는 폭과 깊이를 넓힐 수 있었다.

여기에 내가 연구년 내내 작정하고 길들였던 습관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미국에 오기 전부터 소설가 하루키가 그랬듯이 우리나라에게도 ‘뉴요커’와 같은 잡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망했었다. 한국에 있을 때 여러 읽을 거리에 치여 가끔씩밖에 읽지 못했지만, 그 때마다 감동을 받곤 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뉴요커 1년치 정기구독을 신청했고, 웬만하면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정독했다. 그렇게 하며 미국의 시사, 문화, 시와 소설에 이르기까지 한걸음 한걸음 알아나갔다. 누군가 내게 행복했던 순간을 말하라고 한다면 뉴요커를 읽었던 시간이라고 말하겠다. 더 행복한 순간을 말하라고 한다면, 뉴요커를 읽고 나서 그린웨이를 뛸 때라고 하겠다. 이처럼 독서와 달리기는 내가 미국에서 살아남는 방법이기도 했다.

6월 이후에 노스캐롤라이나를 비롯해 미국 전체적으로 일상을 회복해나갔다. 그렇다고 코로나 사태가 진정된 것은 아니었고, 미국 특유의 개인주의 문화와 경제 위기로 언제까지 문닫고 있을 수만은 없을 터였다. 온라인 수업과 씨름하던 첫째도 방학을 맞아 한시름 놓았다. 고맙게도 아이는 시간이 갈수록 온라인 수업에 적응해나가며 스스로 해나가는 방법을 터득해 나갔다. 문제는 그동안 방치 상태로 놓여 있던 둘째 아이였다. 이제 곧 유치원에 들어가야 하는데(원래 7월 입학 예정이었으나 8월로 늦추어졌다), 미국 유치원은 한국으로 치면 초등 1학년 과정이라 본격적인 학습이 시작되는데, 이런 상태에서 들어가면 아이가 너무나도 버거워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어린이집에 다시 보내기로 했다. 코로나 위험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지만, 다행히 어린이집에서는 확진자가 발생하는 사례가 거의 없고, 그 사이에 미국도 방역을 철저하게 실시하고 있어서 용기를 냈다. 둘째도 나름 경각심을 갖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전 어린이집에서 말을 못해 당한 서러움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자기 얼굴을 10센티미터가량 긁어버린 백인 아이에게 당한 서러움은 마음의 상처로 남았고, 그 상처를 본 내 자신도 이메일로 선생님에게 자초지종을 묻긴 했지만, 회피하려는 백인 교사의 태도에 제대로 항의도 못하고 동양인됨 혹은 마이너리티의 굴복을 보인 것 같아 회한이 깊게 남았다. 새로운 어린이집에서 둘째는 놀라운 속도로 언어를 습득해나갔다. 그동안 어린이 TV 프로그램 앞에서 방치됐던 게 오히려 효과가 있었을까. 어린이집에서 맘에 맞는 친구를 사귀고 그 친구와 종일 놀면서 말도 빨리 늘었다.

8월 말에 아이들 학교는 개학했지만, 온라인 수업으로 이루어졌다. 이제 첫째는 제 혼자서 해 나갈 수 있었지만, 문제는 유치원 과정을 시작하는 둘째였다. 유치원 아이의 온라인 수업을 돌봐주는 것은 첫째 아이를 돌봐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됐다. 아이가 이제 선생님 말을 알아듣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할 수는 있지만, 일단 아이를 제대로 앉히는 것부터 어려운데다, 한시도 혼자 둘 수 없어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 옆에 같이 있어야 했다. 덕분에 나는 미국 국기에 대한 경례 문구를 거의 외우게 됐고, 미국 유치원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속속들이 알게 되기는 했다. 그렇게 유치원 과정 공부를 같이 하고 있다가도 널뛰기하는 것처럼 주로 저녁 때면 듀크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에서 줌으로 개최하는 한국, 중국, 일본, 동남아 등 아시아 지역에 관한 학술모임에 참여하며 전혀 다른 언어의 세계에 참여했다.

움츠리고 있던 나도 10월에 접어들면서 조심하면서 용기를 내 다시금 주변의 난민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래서 캐리와 인접한 채플힐에 사는 난민들을 만나러 갔고, 노스캐롤라이나주와 인접한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조지아주, 버지니아주까지도 난민들을 만나러 갔다. 이때 즈음이면 마스크를 쓰고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미국에서도 규범으로 자리잡았다. 그렇게 난민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박물관과 문화유적지도 둘러보았다. 예컨대 애틀랜타에서는 마틴 루터 킹의 유적지를 둘러보며 미국의 민권운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버지니아주의 미국 정착지와 독립전쟁 기념관을 방문하며 미국 역사를 더 깊이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광활하고 아름다운 미국의 자연과 쭉쭉 뻗은 미국의 고속도로를 누비며 최강대국 미국의 지리 조건을 새삼 알 수 있게 되었다.

10월과 11월은 정치의 계절이기도 했다. 코로나 사태를 시작으로 블랙라이브스매터 운동에 이어대선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미국의 현대사 마디마디에서 나는 제대로 현장 체험을 하고 있었다. 그간 미국 도시와 시골을 돌아다니면서 미국사회의 정치 지형에 대한 감을 잡기는 했다. 11월 5일과 그후 며칠 동안 나는 미국 대선 개표 방송을 눈이 빨갛도록 시청했다. 그리고 그 이후 진행된 일련의 혼란 상황 역시 예의주시하며 미국 정치와 사회의 향배에 관심을 가졌다. 시간은 가빠르게 흘러 추수감사절을 지나고 어느덧 성큼 12월에 이르러 귀국할 때가 다가왔다. 미국 정치는 계속 혼란스러웠고, 코로나는 다시 확산되고 있었고, 나는 돌아가야만 했다. 일단 귀국일을 1월 19일로 정했지만, 내 집에 들어올 사람이 1월 1일에 입주할 예정이라 나는 그전까지 캐리의 집을 비우고 어디론가 가있어야 했다. 어디로 갈 것인가. 한국행 직항 항공편이 뜨는 곳을 물색하던 중 워싱턴을 최종으로 선택했다.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등 모두 욕심나는 곳이었지만, 불행히도 그곳들에서는 2주간 자가격리를 해야했다. 워싱턴 방문자도 자가격리를 해야하지만, 그 건너편 도시인 알링턴은 그런 의무가 없는 버지니아주에 속해 있어 그곳에 귀국 전까지 숙소를 정하여 머물기로 했다. 그렇게 머물며 틈 나는대로 당일치기로 워싱턴을 몇번 왔다갔다 할 생각이었다. 워싱턴 방역 지침을 보니 당일치기 방문은 괜찮은 것 같았다. 스미소니언 박물관은 모두 문을 닫았지만 링컨기념관, 워싱턴 기념탑, 백악관, 국회의사당을 밖에서 둘러보는 것만으로 미국의 심장을 경험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두 자녀들에게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알링턴에 도착하여 그동안 귀국짐 싸느라 지치고 힘들었던 몸과 마음을 풀었다. 앞으로 여기에서 20일이나 지내니 워싱턴 방문을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 사이 나는 알링턴쪽 포토맥강변길을 뛰며 저 건너편 워싱턴을 눈에 담아두었고 유혹에 못 이겨 한번 다리를 건너 워싱턴을 밟아보긴 했지만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되건너왔다. 시간이 아직 많고, 가족과 함께 오고 싶어서였다. 워싱턴의 분위기는 평화로워 보였고, 자가격리 방침이 무색해보였다. 그러나 1월 6일 트럼트 지지자들의 의회 점거 사태가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다. 워싱턴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링컨기념관, 백악관, 의회에 이르기까지 출입을 금지했다. 시간이 많다며 늑장을 부리며 방문을 미뤄왔는데, 아예 못 가게 됐다. 그 사태가 나와 가족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다. 전무후무한 의회 점거 사태가 이렇게 내 곁에서 일어나고 내가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 다시금 내가 현장에 와있다는 실감을 가질 수 있었다. 워싱턴을 코 앞에 두고도 제대로 워싱턴을 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며 1월 19일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나는 이 연구년 기간에 이글 첫머리에 밝힌 소망을 이루었던가. 듀크대의 연구와 교육 인프라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렸던 시기는 고작 두 달도 채 못되었으며, 미국 방방곡곡에 흩어진 난민을 만나지 못하고 내 주변 지역의 난민들만을 만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코로나 사태, 블랙라이브스매터 운동, 대선, 의회 점거 사태 등을 현장에서 경험하는 문화인류학자다운 삶을 알차게 살았고 미국의 자연, 역사, 문화, 사회, 정치를 더 잘 이해하며 내 학문의 지경을 넓히는 기회를 가졌다고 말하고 싶다.